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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순 칼럼(52)

불같은 공명심으로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

재산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오,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도 한다.

적든 크든 잃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매사에 그렇듯 지나친 열정과 집착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세상사를 인과응보 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그 원인과 결과를 풀어보려고도 하지만 이 또한 사람들의 뇌리에 남에게 정도의 법칙성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선인인데도 굶어 죽었고 공자의 많은 제자 중에서 학문을 좋아했다고 홀로 칭찬을 받은 안연(顔淵)은 자주 끼니를 굶었으며 겨 밥 같은 악식(惡食) 마저도 실컷 먹지 못하다가 일찍 죽었는가 하면, 악명 높은 도척(盜拓 춘추시대 도적의 괴수)은 죄 없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는 악행만 일삼았는데도 일평생을 편안하게 지내고 부귀가 여러 대에 이어졌으니 과연 천도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춘추시대에 오기(吳起)는 위나라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권세욕이 강하고 공명심이 높아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벼슬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일은 잘 풀리지 않아 그 많던 재산을 날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기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를 비웃는 3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베어죽이고 남모르게 위나라로 도망을 쳤다. 그 때 성문까지 따라 와 배웅하는 어머니 앞에서 ‘한 나라의 재상이 되지 않고는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고향을 떠났다. 오기는 자기가 실패한 원인을 반성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기는 증자(曾參)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지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기는 재상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나온 터라 가슴 속으로 슬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효(孝)를 모든 도덕의 근본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친구에게 신의를 줄 수 없으며 인군(仁君)에게 충성할 수도, 부부유친(夫婦有親)하며 자손에게 인자하고 사회에 이로울 수 없다는 좌우명이 삶의 지표였던 시대다. 하물며 증자가 공자의 제자 가운데 ‘능히 효에 통한다’ 고 보증할 정도로 효를 중시여긴 사람이다. ‘어머니의 장례에도 돌아가지 않는 불효자를 나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하며 증자는 단호히 오기를 내쫓았다.

오기는 하는 수 없이 떠돌다 노나라 수도 곡부에 가서 병법을 배웠다. 그로부터 몇 해 지나 그의 명성을 듣고 노나라에 오기를 불러 신하로 삼았다. 이 무렵 오기는 제나라 여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얼마 후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오기의 병법을 높이 평가한 조정에서는 오기를 장군으로 삼아 출전시키자는 공론이 돌 즈음 반대론자들이 나타났다. ‘오기의 병법이 뛰어나고 무술은 능하지만 그의 아내는 제나라 사람이오. 처갓집 제 나라에 마음을 내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이처럼 의견들이 분분했다. 오기는 출세와 공명심에 들떠 급기야는 아내를 살해하여 바치는 것으로 반대론자들의 의혹을 풀었다. 노나라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군사를 이끌어 연전연승하여 제 나라를 무찔렀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지만 오기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오기는 공명심만 내세우는 잔인한 사람이다. 젊었을 때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망명했으며 증자의 문하에서도 파문되었다. 또 장군이 되기 위해 자기 아내까지 죽인 자다. 모두 초인적인 공명심과 냉혹함을 말해 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같은 비판에 조정에서부터 공공연히 떠돌았다.

결국 오기는 위나라로 가서 문후를 섬기게 되었다. 문후는 오기가 병법에 통달했다는 점을 높이 사 오기를 장군에 임명하고 진(秦) 나라와 싸워 도읍 다섯 곳을 빼앗았다.

장군으로서의 오기는 무엇보다 먼저 군사들의 마음을 얻는데 노력했다. 군사들과 똑 같이 합숙하며 입는 옷과 먹는 음식도 같았고 잠자리도 같이 했다. 특히 훈련이나 행군할 때에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보병과 또 같이 걸었으며 자신의 양식 자루도 짊어졌다. 어는 날 장졸 하나가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것을 본 오기는 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었다. 이 소식은 병사의 고향에도 전해졌다. 그 병사의 모친은 그 소식을 듣고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제 내 아들 죽네. 내 아들이 죽어! 아이고, 아이고!”

“당신 아들이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동네 사람들이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내 아들은 죽는다니까!”

“당신 아들이 종기로 죽게 된 것을 오기 장군이 압으로 빨아내어 살려놓았다고 하지 않소?”

“그래서 그 애가 죽는단 말이오. 대장군의 몸으로 졸병인 내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는 인(仁)을 베풀었다 하지 않소.!”

그러니까 고마워해야지. 황송해 하기는커녕 그토록 슬프게 울기만 하니 우리들로선 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단 말이요.“

“그 애 아비도 전 날 오장군의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어 그 일로 감격한 그 애 아비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오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가 전사했소. 분명 아들도 오장군의 은혜에 감격하여 제 아비처럼 적지로 뛰어들어 죽을게 분명하단 말이요”

오기가 크게 무공을 세우고 위나라를 섬겨 높은 벼슬에 올랐을 때 문후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무후의 시대가 되었다. 무후도 오기를 중히 여겨 재상의 자리에 앉히려 하자 공숙(公叔)고 전문(田文) 등 기존의 벼슬아치들이 반대하고 모함했다.

이에 오기는 위나라에서 도망쳐 초(楚)나라로 갔다. 초나라 도 왕은 전부터 오기의 평판을 들었으므로 그를 환영하고 재상으로 감았다. 오기는 법령을 밝게 하여 법령을 정리하고 공족(公族)들을 정리하여 국비를 절약하는 한 편 군사를 잘 훈련시켰으므로 초나라는 순식간에 불같이 일어났다. 특히 오기는 도 왕의 신임에 힘입어 새로운 관제를 선포했다. ‘관리부를 정리하여 불필요한 관리는 해고시킨다. 귀족이나 대신의 자제들이 권세를 믿고 국록을 먹으면 엄벌에 처한다. 왕족과 공족 5대손 이하는 자기 힘으로 벌어먹어야 하며 일반 백성과 똑 같이 대우한다. 왕족과 공족의 5대손 까지는 촌수가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적당히 대우한다.’ 등이다.

새로운 법령이 실시되자 백성들은 환호하고 수만 섬이 국고에 환수되었다. 오기는 군사들의 수를 대폭 늘이고 그들의 급료를 대폭 인상시켰다. 이에 모든 군사들은 서로 다투듯 군 복무에 열과 성을 다해 충성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상실한 귀족들의 불만이 대단했지만 도 왕의 신임에 힘입어 오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남쪽으로 화중과 화남에 살던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으로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병합했다. 삼진을 물리치고 서 쪽 진(秦)을 물리쳤다. 그 때 도 왕이 죽었다. 때를 만난 기득권 세력들은 오기를 치러 왔다. 아직 도 왕의 장례도 치루기 전이어서 미처 손을 쓸 수도 없게 된 오기는 그들 반란군을 진압할 방법이 없었다. 오기는 도 왕의 시체 위에 엎어져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창에 찔려 죽었다. 태자가 왕이 되자 오기와 죽은 도와에게 화살을 쏜 모든 군사들을 색출하여 처단했다. 오기의 씁쓸하고도 쓸쓸한 복수였다.

양기성  gsnewsas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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